기억의 현전과 종합을 통해 대상을 식별하고, 대상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가히 인간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과 지각이 행동을 촉구한다면, 감각과 지각은 기억을 통해 더욱 풍부해진다. 인간은 이처럼 기억을 통해 사물을 변양시키고, 그에 따라 자기 자신의 신체와 행동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기억과 정신의 활동이 과연 뇌과학적인 작용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기억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 기억이라는 관점,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유기체의 비결정성고 적응
베르그손은 물질을 이미지로 정의한다. 이미지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지>로 의미하는 것은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른 것 이상의, 그리고 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른 것보다는 덜한 어떤 존재—즉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 길에 위치한 존재—이다.
<물질과 기억>, 22
‘표상 이상’이라는 것은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직 기억이나 오성 등에 의해 판단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뜻하며, 사물보다 덜하다는 것은 사물이 감각기관으로 지각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지각 자체도 아니고, 인식도 아니며, 단지 감각적 지각으로 받아들여진 사물이 나의 기억과 만나기 이전의 단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정적으로 세 가지 종류의 이미지를 설정할 수 있다. 먼저 세계의 선험적으로 자리잡혀 있는 질서, 우주라고 부르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실제적 물질세계라고 불리는 이미지가 있고, 그 다음 우리의 신체 또한 이미지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신체가 실제적 물질에 가한 변양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신체 또한 세계의 물질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한데 왜 그것과 구분되는가? 우리의 주체는 지각행위를 통해 외부 이미지를 받고, 그것에 대한 표상을 생산하며 주변 이미지들에 변양을 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체 또한 외부지각에 반작용하여 어떤 이미지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적으로 신체적 증상이고, 행동화며, 기표로서 신체의 운동이다. 정신분석적으로 이는 창조적일 수도 있고, 병리적일수도 있으나 선재하는 이미지들에 변양을 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베르그송에게 창조행위는 이러한 변양을 통해서만 나온다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에는 두 가지 이미지의 체계가 있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지각한 이미지들의 체계, 그 다음 물질이 신체에 대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있는 우리가 우주라고 부를 수 있는 이미지들의 체계. 그런데 우주라는 불변적인 이미지들의 체계가 있는데, 나의 신체를 통하여 무한히 변화 가능한 이미지들의 체계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 기억이 등장한다. 만일 기억이 없다면 이러한 양립은 불가능할 것이다. 유기체는 외부 세계와 접촉하고 상호작용을 해야만 생명활동이 가능한데, 유기체가 진화될수록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많아지고 정보를 많이 습득하여 유기체의 행동에 무한한 선택지가 제시된다. 다시 말해 외부 세계와 나의 표상이라는 두 이미지의 체계가 있다. 여기서 나의 표상은 외부세계의 이미지가 유기체에 의해 번역되어 나온 이미지이다. 기억과 신경계의 분자적 운동은 이 번역과정을 주도한다. 다시 말해 우리 정신에 수많은 지각과 선택지들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길가에서 묻지마 폭행범과 마주쳤을 때 그가 날리는 주먹을 손으로 막을 수도 있고 발로 막을 수도 있다. 아니면 도망갈 수도 있다. 여러 선택지 중 우리는 기억에 의해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단 하나의 선택지를 선택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기억은 외부 대상을 지각하고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끔 분별력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기체의 욕구와 경향에 따라 온갖 오감으로 받아들인 외부 대상을 하나의 표상으로 응축하고 그로부터 하나의 행동을 촉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수많은 선택지들, 결정되지 않고 간격이 벌어져 있는 지각들을 유기체의 ‘비결정성’이라고 명명한다.
중요한 것은 중추 신경계와 뇌의 분자적 운동은 물질에서 표상으로의 번역과정을 도와주는 것이지 뇌과학자들이나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표상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과 표상 사이에는 그것이 기억으로 응축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지각은 언뜻 보기에 물질 전체에 대한 이미지이지만, 거기에 기억이 개입하는 순간 그 전체는 제한되고 감소되며 하나의 표상으로 응축되어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논의가 진행되었을 때, 우리는 관념론과 실재론이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을 신체로부터 환원된 그 무엇으로 정의하는데, 물 자체와 표상으로 환원된 물질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그것이 기억에 의하여 감소되고 응축되었는가하는 정도의 차이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각은 사물들의 진정한 순간이 아니고 그것은 기억으로부터 응축된 의식의 순간이다. 진정한 사물 자체에 대하여 지각하고 싶다면 기억을 없애면 된다. 하지만 만일 기억을 제거하여 기억으로부터 응축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아닌 사물 전체에 대해 지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미래의 지각들을 도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했던 두 가지 이미지의 체계인 신체를 중심으로 한 변양된 이미지의 체계와 우주의 질서 속에 자리잡은 이미지의 체계는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기억이 삽입 되었는가 아니면 삽입되지 않았는가의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즉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것들의 구분과 결합에 관련된 물음들은 공간보다는 시간의 함수로 제기되어야 한다.”(124) 다시 말해 기억과 같은 시간적 함수만이 그 두 개념의 차이점을 설명해준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억이야말로 물질에 주관적인 특성을 가져다주는 독보적인 역량을 지닌 개념이고, 물질과는 본성적인 차이가 있는 개념이다.
기억의 응축과 개입
한편 기억은 정신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신체 또한 기억한다. 운동선수가 어떤 동작을 반복해서 훈련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신체에 기억되듯, 신체에 새겨진 기억은 정신을 거치지 않고 자동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표상되지 않고 체험되며, 작동되며, 인간의 현재를 구성한다. 그러나 기억은 앞에서 설명했듯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기억은 뇌과학적인 작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지각된 이미지들이 저장되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고 새로운 성향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신체에 새겨진 기억은 노력에 의거하여 정돈되고 질서 있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반면, 우연한 요소에 의해 습득된 기억은 우발적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노력과 훈련에 의한 기계적이고 질서 있는 기억인 신체적 기억을 찬양하지만, 진정한 역량을 발휘하는 기억은 바로 후자다. 물질에 변양을 가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하등한 동물이 주인을 알아보고 걸맞는 행동을 하는 경우 주인을 정신적으로 기억해서가 아니라, 주인과의 신체적 접촉이나 먹이를 통한 조건 반사를 반복하여 쌓인 운동기제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계적인 행위이다. 우발적인 기억은 시간에 따라 잊혀지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존속하며 현재의 행동에 간섭한다. 정신적인 기억은 계속해서 변환되며 응축되고, 현재에 간섭하며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용을 한다. 반면 암기된 기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주관적인 삶과 멀어지는 비개인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은 기계적인 운동과 습관으로 남아 있어 유동적으로 현재를 구성하되, 어떤 창조적 역량을 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정신적인 기억이 현재에 재생되는 양태는 매우 변덕스럽다. 그것은 무의식처럼 우리도 모르게 잠재적으로 현재에 간섭하고 있다. 정신적인 기억은 현재 외부 사물을 지각하는 것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사물을 변양하는 방식으로 지각을 산출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방식이며, 만일 우리가 어떤 위급한 상황에 닥쳐 신경계가 교란되거나, 잠잘 때처럼 의식의 끈을 놓으면 우발적 기억들이 마구 재생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왜곡된 방식만 가지고 사물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암기된 기억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암기된 기억과 정신적인 기억, 둘 중 하나이거나 암기된 기억을 보충하는 정신적인 기억이다. 이처럼 현재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두 개의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대상을 지각함에 있어서 어떤 기억이 개입되는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첫 번째로 식별의 기초에는 운동적 질서에 속하는 요소들이 있다. 이를테면 눈을 감고 걸을 수 있을만큼 익숙한 길이 있다면, 이는 지각에 동반된 운동들이 새로운 지각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잘 조직화되어 습관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처음 가보는 길, 처음 맞닥뜨리는 대상은 아직 그 대상에 대한 정확한 운동적 반응들이 조직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적인 운동을 이끌어낼 수 없다. 지각이 중첩되며 습관이 만들어지고, 특정 대상이나 경험에 대한 적응이 만들어져야 지각과 동시에 기계적인 운동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습관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지각인 나중의 지각에서 대상을 식별하는 정신과 대상에 대한 친숙함이 생겨날 것인데, 이는 식별이 운동적 질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식별함에 있어서 그 대상을 사유하면서 식별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사유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식별은 보통 사유되기 전에 작동된다는 것이다”(166)
그런데 이렇게 운동으로 나타나는 식별, 사유 이전의 식별에는 정신적인 기억이 배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순간에 어떤 대상을 자동으로 식별했다면, 그것은 운동적인 차원에서 식별된 것이지 정신적인 차원에서 식별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동적인 행동은 사유하지 못하게 만들며, 행동을 멈춰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신체의 운동은 정신적인 기억이 생산되는 것에 기여한다. 신경계적으로 인간은 현재적 지각이 적절한 운동들로 연장되어 나타나는 존재다. 그리고 지나간 이미지들, 기억들은 현재적 이미지처럼 운동으로 연장되기를 원하고, 현실적 지각 속으로 미끄러져 자신들이 선택되도록 기회를 엿본다. 마치 무의식이 행동으로 방출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운동적 이미지는 과거의 이미지가 현재에 나타나는 것을 막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것은 현재적 대상에 대한 자동적인 식별이다. 우리의 정신이 사물을 주의해서 볼 때, 또 다른 방식으로 식별이 일어난다. 사물을 주의해서 볼 때 오히려 자동적 기계운동은 없어지고 과거의 이미지들을 불러온다. 이 때 사물과 유사하고 인접한 과거의 이미지들이 불러들여지며, 과거의 이미지들은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이 검열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자신들이 쉽게 현재에 불러들여질 수 있도록 많은 세부사항들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주의해서 식별하고 대상과 관계 있는 기억-이미지를 꺼내는 과정에서, 기억-이미지를 꺼내고 출현시키는 것은 지각이 결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억들이 자발적으로 출현하는 것인가?
외적 지각이 실제로 우리에게 그것의 핵심적 윤곽을 그리는 운동들을 야기하는 반면, 우리의 기억은 받은 지각 위로 그것을 닮은, 그리고 우리의 운동들이 이미 소묘를 한 바 있는 과거의 이미지들을 향하게 한다. 이처럼 기억은 현재적 지각을 새롭게 창조하거나 또는 오히려 현재적 지각에 그것의 고유한 이미지나 동일한 종류의 이미지-기억을 보냄으로써, 그것을 이중화한다. <물질과 기억> 177
기억이 역량을 가진다. 즉, 대상과 인접한 기억이 현재화되며, 대상을 이중화하며 대상에 대한 지각을 새롭게 창조한다. 만일 대상과 인접한 기억이 없다면, 그 대상을 새롭게 창조해낼때까지 더 멀리 있는 기억들을 호출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이 끊임없이 계속되며 지각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주의적 지각은, 대상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 능동적으로 창조하고, 바깥 대상에 투사하는 반성 작용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은 대상에 따라 능동적으로 자신을 바꾸어내며, 창조해내고, 바깥 대상으로 투사하여 새로운 지각을 형성하게한다.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창조하거나 재구성한다”(181).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대상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무한히 팽창하며,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현재적 지각이 있고, 그에 대응하는 기억-이미지가 있다면, 대상에 대한 지적 노력의 증가, 이해의 증가는 또 점증된 현재적 지각을 창출하고, 그에 대응하여 기억-이미지 또한 무한히 팽창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억은 점점 대상을 재구성하고, 계속해서 재구성한다. 지각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많은 양의 이미지-기억들을 전개시키며, 유기체가 어떠한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정신적 현상들이 반복될 것이다.
순수 기억이 아직 대상과 결합하지 못하고 권리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라면, 이미지-기억은 대상과 결합하여 현실화된 기억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자면 순수 기억은 아직 검열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의식에 올라오지 않아서 그 존재조차 모르는 무의식이고, 이미지-기억은 지금 현재 내 신체나 대상을 향해 방출되고 있는 무의식이다. 따라서 순수 기억은 이미지-기억으로 현재화되어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적 대상에 대한 기계적인 반작용을 낳는 지각이 있고, 기억의 반사 작용을 통해 현재화되고 대상을 더욱 창조해나가는 이미지-기억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각이 생산된다. 결국 “우리는 지각에서 관념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에서 지각으로 이행한다”(226).
기억의 존재론, 끊임없는 생성, 현재란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지각은 현재적 대상과 단순한 접촉이 아니며, 대상을 재생산하고 완결시켜가는 이미지-기억이 개입된 것이다. 이미지-기억 또한 순수 기억이 구체화되어 현실적이 된 것이며, 지각이 시작하는 단계로서 정의된다. 이미지-기억이 대상과 겹쳐지고 대상이 지각되는 순간 감각과 지각이 시작되고 행동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순수 기억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기억으로서 그 자체로는 무력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미지-기억으로 변환되어 현실적인 것이 되어야만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기억은 자의적인 상상으로부터 떠오르지 않는다.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홍차처럼, 기억은 어떤 매체를 통해 떠올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를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인 현재란 무엇인가? 인간의 실존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현재는 내가 말하는 순간, 그리고 지각하는 순간 곧바로 과거로 바뀌는 것이다. 동시에 현재는 도래하는 미래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곧바로 멀어지는 과거에 대해 지각하는 순간임과 동시에, 도래하는 미래에 대해 결정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현재란 감각인 동시에 감각으로부터 미래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는 외부 사물과 정신 사이에 위치하여, 기억으로 외부 사물을 응축하는 것을 통해 얻어진 감각과 지각으로 정합적인 행동을 산출하는 장소이다. 끝없는 이미지들이 존속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연속성을 가지며, 매 순간 새로이 생성된다. 인간의 실존은 매 순간 행동하고 결단하는 의식이고, 행동과 결단을 지시하는 것은 기억의 종합과 현전이다. “현재란 단순히 생성되는 것인데, 당신은 현재를 있는 것이라고 독단적으로 정의한다”(256). 모든 지각이 기억이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의 기억이 미래를 결정하는 바로 그 순간이고, 인간의 실존은 연속된 현재의 끊임없는 존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