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의 기독론,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정체성과 구원사
누가는 자신의 글에 예수님을 어떤 이미지로 나타내보이고 있으며, 구원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특별히 누가는 요한이나 마태처럼 예수를 어떤 특정한 이미지로서 제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구약의 예언자들-예수-사도 라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사업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에 훨씬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가 중심적인 목적이다보니, 예수님보다 하나님의 역할이 더 강조되는 것이 특징이며,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저기독론이 문제가 된다. 누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려 예수의 권위를 높인다.
누가복음 안의 세례 요한을 통해 보는 예수님의 정체성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가르친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고,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분으로 여기며, 자신이 감히 세례를 줄 수 없을 정도로 자기보다 높은 분으로 여기는 겸손한 선지자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성서학에서는 조금 다르다. 누가는 과연 세례 요한을 높이 평가했을까? 누가복음 3:20-21의 문맥을 보자.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누가복음 3:20)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누가복음 3:21)
요한을 옥에 가둔 사건 바로 다음 구절에 예수의 세례 기사가 나와있다. 즉,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누가는 기록한다. 또한 사도행전 19:1-7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계심은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곳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행전 19:1-7)
또한 18:24절 이하에서 누가는 요한의 세례를 계속해서 폄하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사도행전 18:24-25)
누가는 왜 이렇게 세례 요한을 싫어했을까? 세례 요한이 그 시대에 너무나도 유명한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누가가 생각했을 때 예수가 메시아로서 돋보이려면, 세례 요한을 깎아내려야만 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을 깎아내려야만 예수가 참된 메시아로서 정체성화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또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누가복음 3:20-21)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요한복음 3:22-24)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가복음을 알고 있었고, 세례 요한에 대한 누가의 기록들을 비판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기록된 예수는 태초부터 존재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말씀이시기에, 누가처럼 세례 요한을 예수의 경쟁자로서 바라보며 굳이 깎아내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예수를 세례 요한과 비교하고, 선지자라는 이미지를 예수에게 입히면서 필연적으로 저기독론의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물론 누가의 목적은 기독론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초대교회와 세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앙적인 이해에 초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간접적으로 누가의 기독론을 추론할 수 있다.
누가는 이 약화된 그리스도의 위상을 사회적 약자인 여성, 가난한 자에게 집중시킨다. 누가는 예수와 하나님을 동등한 위치로 보지는 않지만, 일종의 역할 분담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의 삶을 통해 약자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와 구원사에 대한 누가의 이해
콘첼만은 구약-누가복음-사도행전이라는 세 구조를 규정한다. 누가는 구약의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 초대 교회와 이방 선교라는 세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고 있다. 누가의 신학에서는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하나님의 위상이 강조된다. 이를테면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의 통치에 대한 본문은, 세속 왕국의 권력이 강대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사료다. 이처럼 하나님이 역사적 주권자임이 강조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은 의도적으로 약화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의 주인공이라면 구약과 예수, 교회의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인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누가는 '하나님 중심적인 그리스도 이해'를 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의지가 표현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보편적인 선교로 주제가 바뀐다. 누가는 이를 일관된 관점으로 통합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역사 중에 반영되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누가가 주로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누가복음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누가복음 4:43)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사도행전 19:2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꼐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사도행전 27:24)
이는 누가복음서 2:49, 4:43과 사도행전 19:21, 23:11 27:24 세 차례에 걸쳐 바울은 로마로 가야할 것이다라고 예언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누가는 신적 당위성을 강조한다. 예수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 알고 있었다. 바울 또한 로마로 가면 자신이 죽을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는 구원과 이방인 선교를 하나님의 역사적 주권이라는 동등한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