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왜 멸망했을까? (막스 베버, 고대 문명 몰락의 사회적 원인들)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헬레니즘 문화는 도시 문화였다. 그들은 도시라는 사회적 장소 안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도시 문화를 중심으로 정치와 학문, 건축, 문학, 예술이 발전되었으며, 인간, 사랑, 신 등에 대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담론들이 나타났다. 서구의 정신이 이러한 도시 문화에서 최초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찬란했던 고대 도시 문화는 로마의 몰락과 함께 명맥이 끊겼다. 중세에는 이러한 도시적 문화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인류 문명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고도의 정치체제였던 철인정치나 민주주의에서 봉건제로 퇴보했던 것이다. 왜 이런 퇴보가 나타난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어떤 학자는 강한 전제정치의 억압으로 인해 문화가 멸망했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최상위 사회계층의 사치와 방종으로 국고가 거덜나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학자는 부부관계의 안정성 파괴에 따른 사회 기본단위의 해체가 몰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치와 방종, 전제정치는 그저 증상일 뿐이다. 막스 베버는 몰락의 원인으로서 오히려 더욱 거대한 역사적 진행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역사적 진행이란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바뀌었음을 뜻한다. 부(富)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찬란한 도시 문화를 쇠락하게 한 것이다. 도시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경제체제는 무엇보다도 민초들이 자신의 일상과 삶의 형태들을 결정짓는 양태이자, 도시와 문화를 떠받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다. 따라서 정치는 민초들의 삶과 일상, 도시라는 공동체와 문화를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 경제적 활동을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장치다. 정치적 제도가 없으면, 경제체제는 끊임없이 불평등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도시문화에서 중세의 농촌문화로 이행하는데 어떤 경제적 과정들이 있었으며, 어떤 불평등이 있었는가?
자유노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값싼 노동력
고대의 문화는 도시적 문화였다. 앞서 말한 대로 도시는 정치, 문학, 예술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였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고대 문명은 도시경제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도시경제체제란 도시 안에 경제적 중심부인 시장이 있고, 도시의 거주민들과 근처 거주민들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여러 상업용품이나 공산품에 대한 수요를 모두 시장에서 충족할 수 있는 체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도시 안의 수공업자들은 소비자들의 수요에 따라 자유로운 노동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접적 교환이 시장 내부에서 이루어져 자급자족할 수 있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렇나 자유로운 노동과 부자유노동이 병존했다. 여기서 부자유노동이란 도시가 아닌 농촌 안에서 나타나는 노예 노동이었다. 도시의 자유노동은 농촌의 부자유노동과 병존했고, 도시의 자급자족적 경제활동 또한 농촌의 자급자족적 경제활동과 병존했따. 문제는 이러한 도시 문화와 농촌의 노동이 발전하는 방식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도시 문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유 노동을 통한 교환경제체제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도시의 인구 규모 증가, 교환 범위의 지리적 확대 등의 요인으로 시장이 확대되었을 때 노동 분업이 진전되고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시 시민계층은 농촌에서 일하는 소작농과 노예들을 자유교환시장으로 편입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근대나 현대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체제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농촌은, 단순히 부자유노동 인력 즉, 노예와 땅이 많아질수록 발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고대의 문화가 도시 문화라고 하더라도, 고대의 경제적 발전은 부자유노동력의 증가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전쟁으로 노예들이 많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의 도시 문화는 겉으로는 교환경제체제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하부구조 자체는 대규모 농장과 노예고용조직이었다. 로마가 끝없이 정복전쟁을 한 이유도 이러한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로마의 전쟁은 노예사냥을 통한 노동력 공급과 토지 몰수를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가 전쟁을 하면 할수록, 농민층 대신 노예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노예가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고대의 전쟁은 노예사냥과 토지 몰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정복전쟁을 자주하는 로마의 경우 값싼 노동력이 많았고, 노예소유주를 중심으로 한 부자유노동이 경제활동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로마는 동시에 지중해를 끼고 있는 도시해안문화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이 발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대의 특성상 운송 기술이 형편없었고, 운송에 드는 비용에 비해 로마의 하부구조에서 생산되는 작물의 값이 낮았으며, 찬탄의 대상이 되는 로마의 도로는 애초에 교역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전쟁을 위한 것이었음). 따라서 교역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최상위계층의 귀중품이었다. 교역은 소수 자산가계급에만 허용되었고, 고대 도시 문화에서 교역은 주된 경제활동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원래 도시문화에서 이루어졌어야 하는 자유노동의 분업에 기초한 지역시장에서의 고객주문생산과 교환활동은 로마에서 주된 경제적 활동이 아니었다. 그것과 반대로, 교역이 불가능하고, 값싼 노동력이 많았으므로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활동이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복전쟁의 종식과 노예 노동력의 부족, 지주계급의 탄생
앞서 로마는 도시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체제는 농촌의 부자유노동에 기반한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는 잦은 정복전쟁으로 인해 값싼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운송 기술의 한계로 인해 교역을 통한 경제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마의 부의 형태는 대토지 소유였다. 즉, 로마는 도시의 자유노동과 교환경제를 통한 기술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편 대장원 즉, 대농장에 있는 노예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채찍에 의해 다스려졌다. 부자유노동으로 시장경제를 돌린다는 것은 채찍 없이 불가능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병영생활을 하는 노예에게는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족을 가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병영생활을 하는 노예들은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농업은 노동력을 자체로 재생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외부에서 노예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만, 이러한 부자유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시장에 노예 공급이 중단된다면? 이 시점이 과거 로마에 도래했고, 고대 문화 발전이 전환점을 맞이했다. 즉, 로마 제국의 정복전쟁이 종식된 것이다.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패전과 티베리우스 황제(17~37)가 라인 지역에서의 정복전쟁을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노예시장에 공급되는 노예가 없어졌고, 노예병영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에는 엄청난 노동자 부족 사태가 도래했다.
엄청난 노동자 부족 사태 때문에 노예소유주들이 인신매매를 일삼자, 티베리우스는 대장원의 노예 병영을 개편할 수밖에 없었으며, 제도 또한 달라졌다. 로마 정부는 이러한 사태에 다음과 같은 정치적 답안을 내놓았다. 즉, 노예에게 사유재산과 가족을 가지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노동력이 그 자체로 재생산되게끔 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 초기의 노예와 로마 후기의 노예는 아예 다른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 초기에는 채찍과 함께 사유재산과 혼인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부자유노동이 이루어졌다면, 로마 후기에는 노예가 이러한 대장원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래서 로마 후기의 노예는 이제 병영에서 살지 않고, 주인으로부터 대여받은 토지 안에 있는 노예 거처지에서 산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유재산을 가지는 것이 가능했으며, 가족을 꾸리는 것 또한 허용되었다. 즉, 노예가 비자유 부역농민으로 신분상승을 한 것이다. 노예와 농장주는 더 이상 자유인과 비자유인의 관계가 아니라, 소작농과 지주라는 노동부역관계라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내륙지역의 인구증가와 함께 제국의 중추가 내지로 이동하면 할수록, 내륙 농민층이 더 많은 신병을 제공하게 되었다. 동시에 많은 신병들을 제공하고 경제의 하부구조를 떠맡고 있는 대지주들이 국가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지주들의 입장에서 신병모집은 농장의 노동력 감소를 초래했다. 이러한 이해관계에 따라, 지주 산하 소작농들이 법적으로 경작지에 속박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로마 제국에는 이주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인구조사에 따라 세금을 걷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작농의 주 거주지는 대지주의 영지구역이다. 원래 있었던 법에 소작농을 포함시키기 시작하였다. 즉, 소작농은 법적으로 영지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는 행정적이고 법적인 제도에 의해 ‘지주’계층과 ‘부역농민’이라는 계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노예는 로마 초기의 단순히 값싼 노동력이 아니다. 그는 영지에 법적으로 묶인 소작농이다. 따라서 봉건 제도는 이미 후기 로마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현물경제체제에 따른 관료제와 상비군의 상실
앞서 언급했듯, 로마의 부의 형태는 대토지 소유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토지를 소유해도, 농업은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로마는 국가가 식량보급체계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지주들은 로마의 도시에 곡물을 내다팔 수 없었고, 그렇다고 운송비용을 감당할만큼 곡물이 비싸지도 않았다. 또한 로마의 일렬식 농업 방식은 세심하고 책임감있는 노력에 의해서만 생산물이 나오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노예 노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물의 판매와 교역이 불가능해지자, 농장의 목표는 판매가 아니라 자급자족하는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농장의 자급자족적인 경제활동은 농업이라는 경제의 하부구조를 도시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제국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도시의 시장에서 자유노동과 화폐교환을 통해 먹고살았던 수공업자들, 도시에서 임금과 식사를 제공받으며 생활을 영위했던 사람들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로마의 최상위 부자들이었던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농장에서 나온 산물들을 도시에 내다팔 수 없고, 동시에 자신들의 수요를 도시로부터 공급받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결국 이 대지주들은 자급자족적인 경제방식과 화폐를 통한 교환이 아닌, 현물경제방식으로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이른다.
“그 결과 대규모 영지들은 도시 시장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로 인해 중소 도시 대부분은 자신의 경제적 기반, 즉 주변 지역과의 도시경제적 노동 및 상품교환이라는 기반을 더욱 더 상실하게 된다. …우리 눈에 뚜렷이 보이는 것은 도시들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막스 베버의 고대 중세 연구: 고대 문명 몰락의 사회적 원인들>, 43)
이렇게 변화하는 경제적 상황에 맞추어, 국가의 정책 또한 도시의 쇠망에 한몫했다. 왜냐하면 가장 큰 경제적 부를 산출하는 대농원이 자급자족적 경제방식으로 돌입했고 그에 따라 도시의 경제활동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금도 현물로 받아야 했고, 관료들의 임금도 현물로 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책도 재정 수요와 함께 자급자족적 현물경제체제의 모습을 띠어가고 있었다. 특별히 원래부터 도시가 국가에 납부하는 조세는 화폐가 아닌 곡물이었다. 이러한 관행과 경제적 상황에 따라 국고에는 화폐가 아니라 곡물이 쌓여갔고, 관료들과 군인들의 임금을 현물로 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여러 나라들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로마 제국의 특성상 상비군이 항상 필요하다. 이 상비군이 황제의 권력 기반이었으며,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찰과 신병이 필요했다. 그러나 상비군을 유지하기위해서는 현물경제체제가 방해되고, 현찰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또한 신병을 모집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격감을 고려하는 농장주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었다. 결국, 로마의 군대는 시간이 갈수록 신병을 새롭게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을 자체 재생산했어야만 했다.
집단수용소의 독신노예들의 자리에 가족을 가진 농부가 들어섰듯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독신병영군인의 자리에, 군인가정을 이룬, 사실상 세습되는 직업적 용병군이 들어서게 된다.
(<막스 베버의 고대 중세 연구: 고대 문명 몰락의 사회적 원인들>, 49)
동시에 신병을 로마의 시민 중에서 뽑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로 충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또한 군인들의 임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로마는 상비군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문제를 완전히 현물경제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게 된다. 즉, 이방인 및 군인가정에게 국가가 소유한 토지를 담보로 주며 군인의 의무를 수행하게한 것이었다. 이것이 봉록제의 시초였으며, 결국 로마의 군대는 이방인 집단이 되어버리고, 이방인 집단이 국가 내부에 들어와서 군사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단순히 상비군의 교체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현금조세를 납부할 수 없었던 자급자족적 대지주들에 의해 국가의 상비군들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상비군들은 국가가 관리하는 로마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가정 및 이방인들, 용병들로 채워졌다. 따라서 이미 로마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문화가 아니라 대지주-부역노동자로 이루어진 봉건적 하부구조와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 지역을 수호하는 봉건적 군대로 이루어진 국가가 되어버렸다. 결국 복잡한 관료체계와 엄격한 상비군을 자랑하던 제국과 도시는 사라져버리고, 농촌의 장원영주체제가 주된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결론
결론적으로 로마 제국의 정신적 유산은 소실되었다. 고대 도시들이 창출했던 예술, 정치, 학문, 고대 거래법체계, 재판제도, 화려한 대리석 장식과 신전 등과 같은 우수한 문화는 농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소실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구인들의 정신적 삶은 긴 밤의 여정으로 나락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정신세계의 침몰은 우리에게 그리스 신화의 한 거인을 상기하는바, 이 거인은 어머니 대지의 품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막스 베버의 고대 중세 연구: 고대 문명 몰락의 사회적 원인들>, 54-55)
결국 로마가 몰락하는 역사적 과정은 겉으로는 찬란한 문명의 몰락이자 서구 정신의 쇠퇴이지만, 더욱 거대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회복과정이다. 왜냐하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노예들에게 사유재산과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그들이 인간이라는 지위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간이라는 지위를 회복함으로 인해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촉발되었다. 채찍과 병영 생활로 다스려지던 노예는 더 이상 없다. 도시 문화를 잃어버린 몰락한 서구사회 안에서, 노예만이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노동 속에서 노하우를 얻고, 결국엔 자기의식을 탄생시킬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결국 긴 암흑기를 거쳐 후기 중세에 도시가 부활하였으며, 시민 중심의 경제체제가 마련되어 시민을 억압하는 외적 제도들을 분쇄함으로써, 고대 도시의 문화는 근대 시민 문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농촌으로의 퇴보, 지주-부역노동자의 관계와 상비군의 독립은 봉건적 사회구조를 탄생시키바, 이러한 사회를 기반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수도원의 기반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