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기독론,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정체성과 믿음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복음을 서술한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진실로 믿음에 이른다고 서술한다. 표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표적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정체성을 보려고하지 않고 그 힘과 권능만을 원한다. 그러나 십자가나 부활은 사람들을 진실로 믿음으로 이끌어준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 20:31)
요한복음의 구조
1:1-1:18 : 서론
1:19-12:50 : 표적의 책 Book of Sign
13:1-20:31 : 영광의 책 Book of Glory
21:1-25 : 결론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계에서는 요한복음의 구조를 이와 같이 규정한다. "표적의 책" 안에는 요한복음의 대표적인 표적 7가지가 모두 나온다.
- 2:1-11 갈릴리 가나의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
- 4:46-54 갈릴리 가나에서 가버나움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 5:1-15 베데스다 못에서 서른 여덟해 째 되는 병자를 고치심
- 6:5-14 오병이어
- 6:16-24 물 위를 걸어다니심
- 9:1-7 날때부터 눈 먼 자를 고치심
- 11:1-45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반면 "영광의 책" 안에서는 표적이 나오지 않는다. 표적 대신 예수의 기도, 십자가 사건만을 다룬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의 기능과 의미
독자들은 흔히 표적이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는데 더 초점이 있다. 요한복음 1-12장의 표적은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가 했다고 기록된 일들을 다시 한 번 보고하는데 관심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공관복음서와 다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고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생명의 떡(6:35)에 대한 기사로 넘어간다. 결국 요한복음 6장의 목적은 예수의 행적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려주는데 있는 것이다.
Sign, 표적은 예수의 정체성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 ‘나는 양의 문이라(10:7)’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15:5)’
-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 ‘내가 그다.(18:6)’.
여러 본문들에서 예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표적과 함께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즉 나는~이다, I am~)>라는 말로 드러낸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의 ‘ יהוה (야훼)’이고,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εγω ειμι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야훼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18:6에서 유대인들이 엎드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표적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고, 따라서 저 표적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체성이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의 권능과 힘만을 찬양한다. 7: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예수가 행한 이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그리스도가 오실지라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이적, 권능을 믿었다는 것이다. 이 믿는 자들은 12장에서 모두 떠나간다(12:37). 표적은 예수의 정체를 말하는 기능도 있는 동시에, 그것의 표면적인 의미만 받아들이는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의 저자가 봤을 때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깨닫고 믿게 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Sign, 표적은 실패한 것이다.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2장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은 표적에 대한 저자의 결론이다.
영광의 시
"표적의 책"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표적의 기능과 한계를 묘사했다. 표적은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주기는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진정으로 믿게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표적은 권능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의 욕심과 환상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을 진정한 믿음으로 인도할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요한복음에서 "영광"으로 표현된다.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십자가로서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진정한 예수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를 믿는다.
13장에서부터 고별연설이 시작된다. 하지만 제자들은 계속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의 장례와 이별을 준비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자신들과 함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12장에서 마리아는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는다(12;3).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머리에 직접 향유를 붓지만, 요한복음은 발에 붓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공관복음과 다르게 서술되어 있을까? 이유는 13장에서 나온다. 13장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는다(13:5). 다시 말해 향유로 발을 닦는 장면은 자신과 함께 제자들의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13:36) 하지만 제자들은 계속해서 못 알아듣는다(13:7-8, 13:38).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성을 처음부터 깨닫지 못했던 것은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예수의 표적을 가장 가까이 목격한 사람들이고, 그만큼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로서 정체성보다는 권능과 힘으로서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예수는 언제나 비유로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곳곳에는 제자들이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2)
제자들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60)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2:16)
제자들은 언제 예수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으며, 진정한 믿음의 사도들이 될 수 있을까? 12장 16절에서 미리 나왔던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깨닫는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죽음, 십자가를 의미한다 (7:39, 12:23, 14:13, 17:1). 13-19장까지는 신약성경의 가장 클라이맥스, 아름다운, 심오한 내용은 저녁 두 시간 동안의 일이다. 그리고 20장에서 예수는 부활하시고,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진정으로 깨닫는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게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20:27-31
즉,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표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영광스러운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깨달아지는 것이다.
구원, 기적, 권능과 방언, 예언, 신유 등 초월적인 권능과 은사에만 매달리고 집착하는 교회는 믿음을 떠났다. 성서 없는 구원은 없고, 성서 없이 기적이 일어날 수 없으며, 성서 없는 은사는 공허하다. 교리보다 성서가 더 중요하며, 성서를 통해 자신의 영성을 반성하고, 성서에 의존하여 고난을 이겨내며, 예수를 닮아가려는 노력이 신앙이다. 그러나 많은 보수적인 목사들이 가르치는 신앙은 성서적이지 못하고, 구원, 복, 권능, 기적과 은사만을 추구하는다는 점에서 기복신앙과 다를바 없으며, 세상을 사랑하기는 커녕 세상과 대립하고, 자신들은 구원받았다는 식의 선민의식을 자기애적으로 즐긴다.
표적, 권능, 은사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나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재물을 가져다주는 힘이 아니다. 교회의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고, 표적을 권능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신도들이 올바른 믿음으로 인도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