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 순수이성비판 요약, 칸트의 기본 사상 (프롤레고메나)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란 참 어렵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 이유는 한스 큉이 지적하고 있듯, 대부분의 현대인이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의 언어로 성서와 신, 믿음이나 은사 등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인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역과 영적인 행위들을 불신하고, 그들이 지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저런 행위를 벌인다는 편견을 갖는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체험을 신의 은총으로 생각하는 것은 주관적인 자유지만, 그것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착각한다. 예컨대 영화 <밀양>의 등장인물인 김집사는 주인공이 겪은 불행의 원인을 믿음의 문제로 치부한다. 그녀는 마치 교회에 가면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을 것처럼, 주인공에게 신을 전도한다.
기독교인과 불신자 사이의 주된 갈등은 인간 이성과 인식 능력의 한계를 모른다는 것에서 연유한다. 기독교인은 흔히 자신이 영적인 것을 보거나 느낄 수 있고, 초월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의 문제다. 이 주관적인 경험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이를 강요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만 하는 문제다. 칸트는 이미 200년도 더 전에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함으로써,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이런 오해와 갈등을 방지했다.
감성적 직관과 순수 지성 (순수이성비판 1, 2부)
칸트에게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인간이 보편타당한 학문을 정립하고,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가? 데이비드 흄이나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 학자들은, 경험에서 얻어진 인상들을 결합함으로써 보편타당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칸트는 경험으로부터 엄밀한 보편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험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어떠한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결코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은 가르쳐줄 수 없다. 예를 들어, ‘허리가 쑤시면 곧이어 비가 온다.’라는 것은 경험으로부터 나온 명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다른 이유로 허리가 쑤실 수 있고, 허리가 쑤신다고 해서 반드시 비가 오는 것도 아니다. 이는 엄밀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는 주관적인 지식이다. 경험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칸트의 말대로 경험을 통해 엄밀한 보편성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학문은 선험적인 것으로만 가능하다. 한편 선험적인 명제는 인식의 확장을 이루어주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모든 총각은 남자다’ 등은 칸트가 분석판단이라고 부르는 선험적인 명제의 한 예시인데, 경험으로 확인해보지 않아도 엄밀한 보편성을 가진다. 하지만 이는 판단의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술어가 문장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의 확장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반면 종합판단은 판단의 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혀 다른 외부의 원리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처음 언급했던 저 질문, ‘보편타당한 학문을 어떻게 정초하며,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즉, 칸트의 인식론은 바로 이 질문에 뿌리내리고 있는바, 선험적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성이 어떻게 원리를 도출해내는지 탐구해야만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엄밀한 보편성을 도출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직관은 경험에 의존한다. 칸트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는 경험에 선행하는, 경험을 가능하게하는 선험적 직관 형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직관’을 통해서 대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성’이라고 한다. 칸트는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는 용어를 인간 인식의 선험적인 능력을 가리켜 사용하므로, ‘초월적 감성론’이라는 제목은 우리의 감성 능력이 외부 대상들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머리 안에는 외부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하게 하는 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들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직관 형식으로 우리에게 현상되는 바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선험적 직관 형식이 바로 공간과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은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공간과 시간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하고, 경험을 질서짓는 선험적인 직관 형식이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어느 공간 안에 있다고 인식하고, 대상들이 각기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직관하기 위해서는 공간이라는 관념이 선험적으로 바탕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공간 안에 사물이 없는 상태는 생각할 수 있지만, 공간 그 자체가 폐기된 상태는 결코 생각할 수 없으므로, 공간은 경험에서 취득된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공간은 경험을 가능하게하는 선험적인 직관 형식이다.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우리가 어떤 일을 연속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선험적인 직관 형식이다. 만일 시간이라는 감성적 능력이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면, 어떤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거나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직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순수 기하학과 순수 운동 역학은 선험적 직관 형식인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가능하다. 공간에 있는 사물들을 비교하는 것, 사물이 여기에 있다가 저기로 가는 문제들을 보편타당하게 정립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진 감관 인상들을 직관 형식으로 질서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감관으로 지각한 여러 가지 인상들은 결코 사물들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에 떠오른 표상은 하나같이 사물들 그 자체가 직관 형식을 통해 질서지워진, 현상인 것이다. 우리는 현상과만 관계할 수 있고, 현상 너머에 있는 사물들 그 자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한편 직관에 의해 받아들여진 현상들이 보편타당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판단은 지성에 의존한다. 지성은 자신의 선험적인 범주에 따라 현상들의 연관관계를 규정하고, 재단함으로써 보편타당성을 판단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물들 그 자체에 어떤 보편타당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들 그 자체의 보편타당한 본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단지 우리에게 현상으로서 주어진 것들만을 순수 지성의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만 우리는 외부 사물들에 대한 법칙을 세워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들에 대한 객관성을 얻기 위해서는 사물들이 일단 나에게 현상으로서 주어져 있어야만 한다. 만일 사물들 그 자체의 본성과 사물들 그 자체의 총괄에 대해서 법칙을 세우고자 한다면, 현상으로서 취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순수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가상의 세계에 빠진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칸트는 현상을 판단하는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원리가 또한 우리 머리 안에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순수 지성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태양이 돌을 비춤에는 따뜻함이 뒤따른다’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직관한 현상이다. 이 판단은 아직 지각에 의존하고 있으며,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지각판단에서 ‘이 따뜻하게 함은 태양의 비춤에서 필연적으로 결과한다’라는 보편타당한 명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보편타당성은 순수지성의 12가지의 범주 중 원인 개념이 지각판단에 추가됨으로써 비로소 산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순수 지성 개념을 통해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 경험적으로 직관한 현상을 보편타당한 판단으로 만드는 것은, 순수 지성의 개념들이 그 현상들을 종합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율배반과 이념의 유혹 (3부 변증론)
결국 앞선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인간은 감관으로 받아들여진 인상을 선험적 직관 형식으로 질서지우고, 현상으로써 지각한다. 그리고 그 현상들을 순수 지성의 객관 아래에 포섭함으로써 보편타당한 판단들이 가능하다. 감관을 통해 수집된 인상이 선험적 직관 형식과 순수 지성에 포섭되어야만 경험이 발생한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초월적 감성과 지성으로 포섭된 인상들을 상대로만 경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순수 이성은 그 순수성에 의해 초험적인 성질을 가지며, 이념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이념이란, 이성의 본성으로서, 경험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필연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우주론, 영혼불멸, 자유, 신과 같은 것이다. 이성은 또한, 이념에 유혹되고, 이념을 탐구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이 물음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만족될 수 없다. 헌데 앞서 논의했듯, 인간의 순수 지성은 현상과만 관계하기 때문에, 현상이 될 수 없는 것, 현상으로 잡아낼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학문을 정초해낼 수 없다. 바로 이곳에서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이 나타나는바, 순수 이성은 이념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념을 보편타당한 방식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갈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영혼의 실체를 보편타당하게 정립하고자 해도, 영혼은 감관들에게 전혀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실체라는 개념 또한 데카르트가 말했듯, 연장과 고정불변성과 관련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고정불변성이라는 특성을 경험에 의거해서는 산출할 수 있으나, 영혼으로부터 고정불변성이라는 실체의 특성을 산출해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주를 모두 설명하는 이론을 가질 수 없다. 보편타당성은 경험을 선험적으로 직관하고 판단하는 형식들로부터 가능한데, 인간이 어떻게 모든 우주를 다 경험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관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이론을 보편타당하게 세울 수 있다.
이와 같이 순수 이성의 갈등을 종합하지 못할 때, 우리는 가상에 빠져버린다. 모든 가상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초험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연유한다. 칸트는 이에 대해, “순수 이성이 자기의 초험적 사용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그 미혹에 대한 유일한 예방책”(<형이상학 서설> 244) 라고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가상은 끊임없이 이성을 유혹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이성의 한계를 정립하는 작업, 순수 이성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만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순수 이성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통해 이념들에 대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으며, 보편타당한 학문의 지위를 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념들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인가?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감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초험적인 세계에서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실천이성비판』에서 이 자유의 이념을 실천적인 영역으로 끌고내려와서 인간의 의지규정을 정립한다. 자유는 이념으로서 의식될 수 없지만 의지로서 허용될 수는 있다. 그는 정언명법을 수립함으로써, 자유의 이념을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으로부터 구출해낸다. 하지만 실천이성 또한 이율배반을 발생시키는데, 인간의 실천은 언제나 자연 법칙에 묶여 있으므로, 초험적인 영역인 자유의 이념을 실천의 영역에서 엄밀하게 규제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신의 실존을 요청한다. “최고선이 가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신의 실존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220)
결론적으로 우리는 칸트가 서술하고자 하는 정당한 믿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순수 이성의 이념에 유혹된 지성이 초험적인 영역에 있는 것을 사변적이고 교조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의 영역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믿음과 요청으로만 그 영역과 관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말했던 현대인의 갈등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현대인은 과학을 너무 신용한 나머지,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부분 지식에 불과한 자연과학 및 수학을 모든 세계의 진리로써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과 같은 신앙인들을 불합리하고 덜떨어지는 사람들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은 경험을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고,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믿음을 보편적인 지식으로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변증론에서 말하는 이념의 유혹에 빠져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많은 목회자들은 믿음의 지위를 오해한다. 마치 초험적인 것들이 보편타당하게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설명하고, 단정지어버린다. 그리고 보편타당한 사실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비기독교인들이 죄인이며, 어리석다고 주장하는 것은 혼란과 갈등만 조장할 뿐이다.
칸트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보편타당한 학문이 될 수 없으며, 이성은 규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한계를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그리고 초험적인 것을 감관으로 직관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믿음과 요청의 대상이지, 이성과 직관의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