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프로이트

프로이트 : 죽음충동의 테마(초자아와 죄의식, 상실된 어머니의 육체와 나르시시즘)와 죽음충동의 역설

φιλοσοφία 2025. 1. 22. 02:08

 생물학적인 죽음은 경험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불가피성은 하나의 공포와 불안으로써 현실의 삶 속에서 존재하고, 정신이 그것에 대항하기 위하여 방어적 제스처들을 유발해낸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해 있다. 한편 정신분석학은 긴장이 제로인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보수적인 충동(죽음충동)을 전제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음 충동이 다양한 생명의 제스처와 함께 있으며, 다양한 테마 안에서 순수한 파괴성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역설적으로 생명을 지탱하는 근거로써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죽음본능의 테마들

    사회와 공동체는 개인들의 폭력성과 죽음본능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 본능은 외부로 돌려진 사디즘과 자기 자신에게 돌려진 마조히즘, 초자아와 죄의식 속에서 표현된다.

    문화와 공동체의 법과 질서, 그리고 부모나 선생의 훈계와 말은 주체의 초자아를 형성한다. 물론 정상적인 초자아는 적절한 법과 금지를 통해 주체의 원시적인 충동이 자아 이상을 통해 승화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초자아는 사회와 부모의 언어로써 개개인의 죽음본능과 파괴적 본능을 금지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죽음본능은 겉으로 억제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죄의식으로 돌려져서 나타난다. 현실원칙 때문에 죽음 본능이 억제되고, "아! 내가 어떻게 이런 비도덕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정말 못된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죽음본능은 죄의식으로 발휘된다. 무거운 죄의식에 짓눌리며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처벌하고, 자기를 벌함으로써 무거운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마조히즘적 쾌락을 누린다. 이런 이유에서 초자아와 죄의식은 죽음 본능의 문화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죽음 본능은 나르시시즘적 욕망과 함께있다. 프로이트에게 1차적 나르시시즘은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어머니에게 의존하며 얻는 자아 충동의 만족이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를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존재의 안정성과 통합성을 얻는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적 충동 속에는 언제나 전체성과 안정성, 완전성 등에 대한 환상이 함께 있는데, 이러한 환상이 바로 <긴장이 제로인 상태>를 자동적으로 연상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나르시시즘적 충동, 이를테면 구강기 충동과 함께 누리는 통합되고 안정된 느낌은 그것이 무생물의 정지된 상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완전한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는 점에서 죽음본능이며, 삶과 생명을 상징하는 변화와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는 예상치 못할 변화와 불안 속에서 무엇인가 의존할 구강기 대체물(담배나 술, 전이 대상과 같은 것들)을 찾으며 그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구강기 대체물은 주체를 죽음과 어머니의 육체, 퇴행으로 이끄는 물신이며 이때 인간은 변화와 정지라는 근본적인 모순성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적 충동의 가운데에는 어머니의 육체가 있고, 그것에 대한 주체의 환상과 죽음본능이 있다. 무생물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죽음본능은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어머니의 육체와 관련된다. 출산 경험과 더불어 상실해버린 어머니의 육체로서, 1차 나르시시즘에서 경험한 어머니의 느낌과 훗날 대상에게 전이시키는 허구적 이미지의 반복으로서, 인간이 불가피하게 되돌아갈 대지에 대한 비유로서.

 

죽음본능의 역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반복강박을 설명하기 위해 죽음본능을 대입했다. 죽음본능이 "유기체가 탄생하기 이전의 상태, 긴장이 무無인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보수적 충동"이라는 정의를 가질 때 우리는 반복강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러한 죽음 본능에 대한 정의는 프로이트가 그간 주장해오던 자아의 '자기 보존 본능'이나 '충동을 승화시키는 기능'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포기하지 않고, 정신적 과정은 여전히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방향지워진다는 견해를 유지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생명의 목표를 처음 출생하기 이전의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설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이트는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아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필멸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출생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죽음 본능에 의해 자아가 지배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반복강박, 사디즘, 마조히즘이라는 테마 안에서 이러한 역설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들 모두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아의 움직임이고 에너지의 방출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완전한 무생물의 상태로 이행하고자 하는 퇴행이 함께 존재한다. 나르시시즘적 충동 속에서도 이러한 두 가지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우울증은 대상 상실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애도하지 못하여 나타나는 증상이다. 자아는 대상을 무의식 속으로 함입하고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에 대항하여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제 1차 나르시시즘, 어머니와의 완전한 동일시, 죽음으로의 퇴행이다. 

     한편 프로이트와 라캉에게 우리의 자아는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외상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특별히 상징계는 상실된 것, 대상a를 상징으로 은유-환유시키며 대체적으로 만족시키는 기관이다. 상징계에 정박된 주체는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항상성을 유지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따라서 자아는 바로 또 다른 의미에서 죽음의 사건, <무생물적인> 모먼트를 가져다주는 어머니의 육체를 상실한 사건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죽음본능은 <무생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보수적 본능>임과 동시에 이러한 통일적인 상태를 거세하는 범죄적이고 창조적인 힘이기도 하다. 자아의 탄생과 기능이 이 죽음본능의 두 가지 역설적인 기능을 잘 보여준다. 자아는 어머니와의 분리를 촉진시킨 이 창조적 힘으로부터 건축되었지만, 동시에 항상성과 자기보존을 위해 언제나 긴장을 제로로 만들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을 없애고자 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지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며 드러난다.

 

 

참고문헌 : <쾌락원칙을 넘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지그문트 프로이트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 엘리자베트 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