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핵심개념 (2) : 쾌락원칙과 현실원칙, 그리고 항상성의 원칙
쾌락원칙과 현실원칙, 그리고 항상성의 원칙
누군가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개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이 되는 개념들은 많겠지만 쾌락원칙과 현실원칙, 그리고 항상성의 원칙을 빼놓을 순 없다. 필자는 프로이트의 논문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1911),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을 통해 저 세 개념을 설명하겠다.
이 개념들을 알아야 초기와 중기 프로이트를 이해할 수 있고, 나중에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정신 구조인 "이드, 자아, 초자아"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의식, 전의식, 의식"이라는 정신의 구조를 "이드, 자아, 초자아"로 바꾼 이유가 바로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정신병 환자들이나 외상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대적인 정신구조의 수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쾌락원칙, 현실원칙, 항상성의 원칙"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정신구조와 이 원칙들을 통합했다. 즉, 이 개념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통용되는 개념이다.
쾌락원칙
우리는 이 무의식의 정신 과정을 더욱 오래된, 원초적인 1차 과정으로 간주한다. 이런 1차 과정을 지배하는 규제 원칙은 비교적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로 쾌락-불쾌의 원칙, 또는 더 간단히 쾌락원칙Lustprinzip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원초적인 제1차의 정신 과정들은 쾌락을 추구한다. (프로이트,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 11)
쾌락원칙이란 무엇인가? 전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1차 과정이란 무의식적 정신 과정들을 일컫는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원칙이 쾌락원칙인데, 이는 무의식적 사건과 과정, 변화들이 모두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의 정신이 쾌락만을 추구하도록 방향지어져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인가? 프로이트는 정신 전체가 아니라 오직 무의식만 짐승과 다를바 없다고 설명한다. 무의식은 언제나 긴장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억압된 충동을 방출하여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칙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으며, 무의식이 이렇게 쾌락만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사회성을 가질 수 있을까?
현실원칙
아이가 갓 태어나서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아이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 세상에서 타자와 더불어 살기 위해 법을 지켜야 하고, 타인을 배려해야 하며, 자기의 충동을 마음대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현실의 중요성이 아이에게 깨우쳐지고, 아이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무의식적인 쾌락원칙은 점차 규제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현실 원칙으로 대체된다.
우리의 정신 기관은 환각을 통한 만족 대신에 외부 세계에서 현실적 상황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그런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신 기능의 새로운 원칙이 도입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실원칙>이 설정되는 단계는 분명 아주 중대한 단계인 것이다. (프로이트,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 13-14)
따라서 현실 원칙은 말 그대로 현실의 원칙들이다. 사회와 법, 공동체의 세계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 원칙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의 쾌락 원칙이 모두 드러나지 않거나 무의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랬으면 무의식이라는 지평 자체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은 쾌락 원칙을 현실 원칙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쾌락 원칙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현실 원칙의 대체가 쾌락 원칙을 보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가 불확실한 어떤 순간적인 쾌락은 포기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을 통해서 나중에 더욱 확실한 쾌락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프로이트,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 19)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현실 원칙의 대체가 쾌락 원칙을 보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은 언제나 교착상태에 있으며, 갈등하고 있다. 무의식에서는 긴장을 해소하고자하고, 성욕을 만족시키고자 하고, 충동을 방출하고자 하는데 이는 언제나 현실 원칙에 가로막힌다. 우리는 학교에 다녀야하고, 회사에 다녀야하고, 가족과 친구, 동료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나의 충동을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게임하고 나가 놀고 싶지만 공부를 하고, 직장 상사가 불합리하게 혼내도 나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그리고 나의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참아야만 한다. 즉,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은 언제나 갈등한다. 그러나 "새로운 길"이 존재한다. 즉, 그것은 증상이다. 이 갈등이 심화되어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 무의식은 의식과 현실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충동을 방출하는 것이다. 이 방출이 지속되거나 병리적인 형태를 취할 경우, 정신분석에서는 그것을 신경증이라고 명명한다. 반면 증상이 아닌 방식으로 갈등과 긴장을 해소하고 방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꿈이나 농담같은 것이다. 꿈 또한 억압된 것을 의식이 알지 못하게 방출한다는 점에서 신경증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저 본문에서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오히려 "보호"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항상성의 원칙
우리로 하여금 정신생활에서 쾌락원칙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는 사례는 정신 기관이 그곳에 있는 흥분의 양을 가능하면 낮은 상태로, 혹은 적어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가설에서도 발견된다. 이 후자의 가설은 쾌락 원칙을 진술하는 또 다른 방식에 다름 아니다. 쾌락 원칙은 항상성의 원칙으로부터 나온다.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269, 272)
항상성 원칙이란 무엇일까? 항상성 원칙은 쾌락 원칙과 사실 이름만 다르지 거의 같은 원칙이나 다름없다. 항상성 원칙은 이처럼 우리의 정신이 언제나 긴장을 해소하고,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방향을 잡는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정신분석에서 "쾌"라고 하는 것은 흥분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에서 "쾌"는 오히려 흥분이 없고, 긴장이 해소된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쾌락이라고 한다면 성적으로 흥분한 상태에 있고, 오르가즘을 느끼며, 어떤 흥미진진하고 긴장된 상태를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에 따르면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사이의 갈등이 없는 상태, 억압된 것을 방출하여 긴장이 해소되는 과정을 쾌라고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불합리하고 억울한 상황에 휘말리고 직장 상사와 계속해서 갈등상태에 있다. 그 사람은 직장상사에게 매일 수많은 무시를 받고, 이를 매일 참는다. 이는 일반 상식적으로나 정신분석으로나 불쾌에 속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단순히 그가 억울하고 직장 상사에게 무시를 당해서 불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확히 그는, 쾌락 원칙에 의해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지만 현실 원칙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그 갈등 때문에 불쾌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매우 심해지면, 무의식은 항상성의 원칙에 의해 꿈, 실수 행위, 증상 등으로 억압된 공격적 충동을 방출한다.
정리하자면 우리의 정신은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의 갈등이 심해지면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증상이 나타나고, 꿈을 꾸며, 더 많은 실수행위를 하면서 억압된 충동을 남모르게 방출한다. 우리의 일상생활 또한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증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스스로 그 충동을 방출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말이나 밤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게임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등 흔히 여가 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즐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갈등을 해소하는 좋은 "통로 혹은 방출구"를 갖는 것이다. 나의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이 나에게 이롭고 사회에도 이롭다면, 그 충동은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승화"로서 나타난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