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상담치료는 굉장히 구조화되어 있다. 상담 윤리같은 것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처럼 법으로까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일주일에 몇 번 상담하는지, 내담자의 호소 문제는 무엇인지, 몇 회기 상담인지 등을 미리 정해놓고 시작한다. 물론 회기 안에 내담자의 호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상담을 종결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리 상담사들은 일반적으로 종결을 결정할 때, (내담자가 먼저 그만둬버린 경우가 아니라면) 내담자가 아닌 외부 법적인 요인에 기댈 때가 많다. 언제 우리는 종결을 판단할 수 있을까?
언제 종결하는가? 그리고 왜 종결을 확신하기 어려운가?
분석은 어떻게 종결되는가? 바람직한 종결이 무엇인가? 분석가는 환자가 더 이상 증상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종결을 판단할 수 있다. 분석가는 환자의 무의식이 의식화되고 해명되었을 때, 그래서 환자가 고통받고 있는 병리적인 것들이 더 이상 재발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 분석을 종결시킨다.
그러나 종결은 확신되기 어렵다. 여러 보고들에 따르면 분석가가 종결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 증상이 재발하는 경우(꼭 같은 병이 아니더라도)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인가? 내담자가 빨리 분석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니면 어떤 부정 전이 때문에 증상이 괜찮아진 척 분석가를 속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담자와 분석가도 찾아내지 못한 무의식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담자가 상담자를 속이는 경우는 라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위주로 탐색하면 된다(보통은 상담자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여 드랍된 이후에 탐색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후자는 탐구해볼만 하다. 어떤 무의식적인 이유가 있을까?
- 자아의 변질
- 성적 욕동의 크기 (기질적인)
- 정신적 외상
욕동의 크기와 정신적 외상은 모두 증상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욕동이 크면 그것이 해결되지 못했을 때 좌절과 정신적 외상이 덩달아 커지고, 증상을 남긴다. 그러나 욕동의 크기가 작더라도 매우 강렬한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다면, 마찬가지로 증상을 낳는다. 여기서 분석이 깔끔하게 종결로 향할 수 있는 경우는 증상이 정신적 외상에 의한 것일때이다. 왜냐하면 내담자가 그 외상에 대한 감정과 상처, 기억 등을 꺼내고 고백할 수 있고, 그것이 새롭게 의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욕동이 강한 경우, 그것은 분석의 종결을 무기한으로 미루어버릴 수 있다(적어도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그러나 내담자의 욕동이 선천적으로 강한지, 아니면 특정 조건에 의해서 강해진 것인지, 미래에 다시 증상이 재발할지 예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불가능하다. 따라서 분석의 종결을 100%확신을 통해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분석에는 끝이 있는가?
한 번 치료 경험이 있는 환자는 자아가 더욱 견고해져서 훗날 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는가? 그 자아의 변질은 다른 병의 예방에도 효과가 있는가? 정신분석으로 병을 예방할 수 있는가? 아직 병에 안 걸린 사람에게 예방을 위해 일부러 병인이 되는 갈등을 불러일으켜서 예방할 수 있는가? 치료에 성공했지만 훗날 다시 병에 걸리는 환자를 보고 우리는 정신분석 치료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 자아의 갈등, 즉 증상의 원인이 되는 욕동의 요구를 항구적으로 청산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은 욕동이 자아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 수는 있다. 억압된 무의식을 꺼내와서 해석함으로써 욕동이 더 이상 증상으로 방출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거친 자아는 훗날 병을 어디까지 방어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분석 경험 중 이것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분석으로 인하여 증상이 없어진 것이 꼭 치료가 아니라 억제의 저항을 증가시키는데 그쳐서, 방어가 더욱 강해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갈등을 치료한다고 해서, 미래의 갈등이 예방된다는 것은 그 정당성에 대하여 아무런 보장이 될 수 없다. 정신분석 치료는 갈등에 대한 모든 무의식을 꺼내서 모조리 해석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분명 남은 요소들이 존재하고, 치료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을 증명하기란 힘들다. 왜냐하면 이것은 잠들어 있는 무의식, 즉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변적인 영역에 대한 추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에 내담자가 어떤 증상을 들고올지, 증상이 재발할지 안할지를 예상하는 것은 전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다. 무의식은 무시간적이고, 우리가 얼마나 분석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증상과 현상을 통해서만 무의식을 만날 수 있다.
이것들은 분석가의 입장에서 고려할 수 있는 치료법의 한계다. 그렇다면 치료를 통하여 혹시 내담자의 자아가 강하고 견고하게 변질된다면, 그 변질되는 조건이나 결과에 대해 통찰할 수 있다면 예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아의 변질, 자아의 변경이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습득되는 것인가?
자아는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욕동이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 그것은 사회의 질서에 어긋난다. 따라서 자아는 욕동의 요구와 현실의 외재적인 대립이 아니라 욕동의 요구와 자아의 내부적인 대립으로 대립의 장을 바꾼다. 이때 사용되는 방어의 기술이 바로 방어기제이다. 그런데 환자만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 또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서 방어기제는 구조로 자리잡기 마련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라캉과 비슷한 말을 하는데, "모든 사람이 신경증자"라는 것이다. 즉, 자아를 변질시킨다는 것은 방어기제를 통하여 자아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치료는 자아의 변질을 일으키는 방어기제의 강도와 삶에 뿌리 박혀 있는 깊이에 달려 있다. 결국 치료에 의해서이든 주변 환경에 의해서이든 후천적인 자아의 변화는 이런 방식으로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자아의 변질에 대하여 그 본질과 결정적인 조건들이 무엇인지, 그것을 명명백백히 밝혀낼 수는 없다. 자아는 유년기의 방어 투쟁을 통해 획득된다. 모든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방어기제가 있는데, 유년기때 방어기제를 선택하면서 자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적인 기질이나 경향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자아의 선천적인 본질이 무엇이고 후전적인 변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권리도 없고 근거도 없다. 다만 분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아가 선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아는 방어 투쟁으로 획득되고 변질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유전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결국 프로이트는 종결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무의식을 모두 알 수 없으며, 우리의 자아 구조를 우리가 원하는대로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분석의 성공은 분석가가 자신의 문제를 얼마나 잘 돌아보느냐에 따라 달렸다. 프로이트는 본문에서 심지어 모든 분석가가 5년 주기마다 분석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끝이 없는 분석이어야 한다. 또한 분석가는 환자의 모델로서, 스승으로서, 또한 분석에 필요한 권위를 위해서 지적이고 관계적인 탁월함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고, 내담자의 행동, 제스처, 말투, 단어 등을 모두 주의 깊게 관찰하여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는 진실을 좇고자 하는 긍정적인 집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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